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과달카날 해전 (문단 편집) === 논공행상 === 본 해전에서 전사한 캘러헌 제독과 스코트 제독은 후일 나란히 [[키드급]] 구축함의 함명으로 이름이 붙었다. 캘러핸 제독의 기함 [[뉴올리언스급 중순양함]] 샌프란시스코는 일본군의 집중 포격으로 함교 인원이 거의 몰살당하고 선체도 대파되었으나 남은 장교들과 승조원들의 필사적인 보수작업으로 침몰을 면할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는 과달카날 해전 한 번으로 캘러핸 제독을 포함, 총 4명이 [[명예 훈장]]을 수훈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미군의 경우 고위 지휘관 2명을 한꺼번에 잃었지만, 일본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1차전의 함대지휘관 아베 제독에게 작전 실패의 책임을 물어서 본토로 소환하고는 강제퇴역시켰다. 2차전의 지휘관 곤도 제독은 전함 파벌에 속했던 탓에 구축함 수뢰전대의 전문가였던 아베 제독처럼 목이 날아가진 않았으나, 야마모토는 트럭섬에서 출항하지 않는(...) 함대의 제독 즉 한직이라 할 수 있는 보직으로 곤도 제독을 보내버렸다. 이 해전에서 대파당한 뒤 잔존 아군 함선과 함께 전선에서 이탈 중이던 경순양함 주노가 일본 잠수함 I-26의 뇌격에 침몰했는데 이때 주노에 같이 탔던 [[설리번 5형제]]가 모두 전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이후부터 미 해군은 형제들이 동일 함정 및 동일 부대에서 근무하지 못하도록 엄금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전에도 금지사항이기는 했으나 엄격히 지켜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설리번 5형제]]가 사망하면서 확실히 지키게 되었다.] 이 사실에 분노한 홀시 제독은 헬레나의 함장이자 켈러헌 소장이 전사한 후 지휘권을 양도받았던 길버트 후버 대령이 '''물에 빠진 아군을 구출하는 의무를 완전히 외면했고''' 일본 잠수함에게 반격을 하지도 않았으며 주노의 격침을 즉각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임시켰다. 다만 니미츠 제독은 보고 지연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하지만, 당시 잠수함의 위협이 남은 상황이라는 점 등을 고려할 때 후버 대령이 철수한 것 자체는 타당한 결정이라고 판단했다. 여하튼 후버 대령은 이후 다시는 일선 지휘관을 맡지 못했고 1947년에 퇴역했다. 사우스다코타의 토머스 개치 함장은 전투 자체는 잘 수행했으나 이 전투가 그의 마지막 함선 근무가 되었다. 산타크루즈 해전 때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서 더 이상 함선 근무를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우스다코타는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대공 전투를 치르며 함교에 피해를 입었다. 개치 함장은 이때 부상을 입고 한 달간 부재중이었다가 복귀하였다. 이때 승조원들에게 산타크루즈 해전의 공로로 받은 훈장은 내가 받은 것이 아니라 모두가 받은 것으로 생각하겠다고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러나 이 부상이 결국 악화되어서 과달카날 해전을 치른 이듬해 1943년 2월부터는 더 이상 배에 타지 못하게 되고, 법무 쪽에서 커리어를 계속 쌓아 중장까지 진급했다.[* 16대 해군 법무감(Judge Advocate General of the Navy)을 역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